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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파이터를 개봉했을 당시 남포동 부산 극장에서 봤는데 자리가 없어 맨 앞줄에서 봤었습니다. 그 당시 영화관은 맨 앞줄에 앉으면 고개를 들고 스크린을 올려다봐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여자친구와 둘이서 고개를 계속 들고 영화를 보고 있으니 기린목 될 판이라고 서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바람의 파이터, 부산극장 맨 앞줄에서
2004년 여름, 남포동 부산극장의 상영관 안은 개봉작 <바람의 파이터>를 보러 온 관객들의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일찍 서둘렀음에도 이미 남은 좌석은 스크린 바로 아래인 맨 앞줄뿐이었습니다. 20대 중반의 혈기 왕승하던 시절이었지만, 목을 직각에 가깝게 꺾고 거대한 화면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좌석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도전처럼 느껴졌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여자친구는 스크린의 화려한 액션 프레임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살짝 투덜거렸습니다. 주인공 최배달의 거친 주먹질과 격렬한 동선이 전면에 펼쳐질 때마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데이트를 준비한 입장에서 미안함이 밀려왔지만, 솔직히 저 역시 거대한 시야각에 눌려 주인공의 주먹이 어디로 향하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나도 스크린이 너무 가까워서 액션이 잘 안 보인다"라며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양해를 구했습니다.
화면 속 격투가 이어질수록 저희 두 사람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점점 더 뒤로 넘어갔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고 웃겼던지, 영화가 끝날 무렵엔 "이러다 우리 둘 다 기린목이 되겠다"라며 서로의 꺾인 목을 바라보고 깔깔거리고 웃어버렸습니다. 비록 영화의 강렬한 타격감을 온전히 감상하기엔 형편없는 시야각이었지만, 불편함조차 유쾌한 추억으로 승화시켰던 그날의 웃음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포동의 그라데이션된 조명 빛과 함께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불편한 매서운 좌석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특별한 비하인드 스토리의 무대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제 청춘의 한 페이지입니다.
태권도 2단이 극진가라데에 꽂힌 이유
청소년 시절의 제 일상은 도복 깃을 매만지고 품새를 익히는 정갈한 흐름 속에 있었습니다. 무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태권도장에 발도장을 찍으며 땀방울을 흘렸고, 그 결실로 단단한 공인 2단 품증을 손에 쥐었습니다. 발차기 하나에 공기를 가르는 타격감을 배우며 무도에 대한 깊은 애착을 키워갔으나,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시작된 기숙사 생활은 저를 도복과 잠시 이별하게 만들었습니다. 좁은 기숙사 방에서 규율된 일상을 보내면서도, 제 마음 한구석에는 늘 무도에 대한 아쉬움과 열망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태권도를 깊이 몸으로 익혔던 경험은 자연스럽게 이웃 나라의 무술이자 발차기와 타격의 유사성을 지닌 가라데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가라데의 다양한 파벌과 역사를 탐구하던 중, 극진가라데라는 실전 무도의 창시자가 다름 아닌 한국인 최배달(최영의)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타국에서 맨주먹 하나로 세계의 무도인들을 제압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 동포라는 점은 한창 혈기 왕성하던 저에게 커다란 자부심이자 가슴 뛰는 울림이었습니다.
특히 거대한 황소의 뿔을 맨손으로 부러뜨리고 단번에 제압하는 과거의 흑백 영상은 어린 시절 제게 커다란 충격과 경외감을 선사했습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듯한 그의 압도적인 기량과 무도 정신에 매료되어 최배달이라는 인물의 서사를 찾아보는 것이 당시 제 가장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의 격동적인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바람의 파이터>가 개봉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망설일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학창 시절 땀 흘려 연마했던 태권도의 기억과 실전 가라데에 대한 깊은 호기심, 그리고 영웅에 대한 향수가 한데 어우러져 극장으로 향하는 제 발걸음을 그 어느 때보다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일본 속 한국인, 빠칭코로코로~가 더 기억에 남은 이유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관람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잔상이 남았던 장면 중 하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주연의 화려한 액션이 아닌, 배우 정태우 씨가 연기한 조연 캐릭터의 능청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가 리드미컬하게 읊조리던 "빠칭코로코로~"라는 엉뚱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대사는 시종일관 무겁고 처절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속에서 묘한 청량감을 주었습니다. 일본이라는 타향살이의 고달픔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재일코리안의 서글픈 현실이 그 유쾌한 대사 한 마디에 씁쓸하게 녹아있는 듯하여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이 장면은 자연스럽게 일본 대중문화와 경제사 속에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수많은 한국계 인물들을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극진가라데의 최배달을 시작으로 프로레슬링의 전설 역도산, 일본 오락 산업의 거물 마루한의 한창우 회장, 전설적인 타격왕 장훈, 박치기왕 김일, 그리고 롯데그룹을 일군 신격호 회장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수많은 이들이 이방인이라는 차별을 뚫고 각 분야의 정상에 섰습니다. 타국에서 정체성을 지키며 대중을 사로잡았던 그들의 삶을 되짚어보니, 일본 사회 내부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깊고 거대한지 새삼 가슴 뭉클한 자긍심이 밀려왔습니다.
한편 관람 내내 옆자리에 있던 여자친구는 최배달이라는 인물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는 데 꽤나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스크린 속 주인공이 목숨을 걸고 전국의 무도관을 돌며 펼치는 '도장 깨기'나, 산속에서 고독하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험난한 수련의 이유를 전혀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얼굴과 몸이 깨지고 맞아 나가는 게 저렇게 두려운데, 왜 굳이 제 발로 찾아가서 저렇게 무모하게 싸우는 거야?"라며 던진 질문에는 깊은 의문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영화 중간중간 소곤거리며 무도인이 지향하는 세계관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남을 이기기 위한 폭력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엄격한 '심신 단련'의 과정임을 차근차근 전했습니다. 타격의 아픔보다 자기 자신에게 패배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무도인의 집념을 들려주자, 그제야 여자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공의 거친 호흡에 공감하기 시작했습니다. 타국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거장의 삶과 무도 정신을 연인에게 전했던 그 순간은 단순한 영화 관람을 넘어 서로의 시선을 넓혀준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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