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전협정이 조인되고도 실제 효력이 발생하기까지 12시간이 남아 있었고, 그 시간 동안에도 병사들은 죽어야 했습니다. 저는 영화 고지전을 보다가 그 사실을 처음 제대로 직면했고, 숨이 턱 막혔습니다.
전선야곡과 백마고지, 팩트로 읽는 고지전
고지전은 2011년 장훈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6.25 전쟁 당시 실존했던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모티브로 삼아 가상의 '애록고지'를 무대로 설정했습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철의 삼각지대, 즉 평강·철원·김화를 잇는 전략적 삼각형 지형의 핵심 거점이었습니다. 여기서 철의 삼각지대란 중부전선 장악을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어느 쪽이 이곳을 점령하느냐에 따라 전선 전체의 흐름이 바뀌는 지형을 의미합니다. 북한군이 이 지역을 대한민국 공격의 본부 역할로 삼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습니다.실제 1952년 10월, 중공군은 4만 명이 넘는 병력을 투입해 열흘에 걸쳐 백마고지를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당시 국군 제9사단이 이를 방어하며 고지 주인이 24차례나 바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출처: 국가보훈부). 저는 이 수치를 보는 순간 영화 속 장면이 단순한 극적 과장이 아니었음을 실감했습니다. 뺏고 뺏기는 소모전의 반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문자 그대로의 묘사였는지.영화에서 국군이 중공군의 야간 포위 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장면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중공군은 무선통신 대신 나팔과 꽹과리로 부대 간 의사소통을 했고, 낮에는 완벽하게 은폐하다가 야간에 포위망을 좁혀 사방에서 일제히 공격하는 섬멸전술을 구사했습니다. 여기서 섬멸전술이란 적을 완전히 포위한 뒤 병력 기동력을 최대화해 단시간에 전멸시키는 전투 방식을 뜻합니다. 당시 국군은 이 전술에 크게 당했고, 병사들은 이를 '인해전술'이라 불렀습니다.고지전에서 제가 가장 주목했던 장면은 병사들이 안개 짙은 참호 속에서 '전선야곡'을 부르는 대목이었습니다. 사실 그 노래는 저에게 낯선 곡이 아니었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부서 상무님이 회식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18번으로 부르시던 바로 그 곡이었거든요. 술기운이 오르신 상무님이 눈을 감고 부르실 때 저는 그저 기계적으로 박수를 치며 다음 날 출근을 걱정했습니다. 가사를 한 번도 진지하게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고지전 속에서 그 노래를 다시 들었을 때의 충격은 꽤 컸습니다. 흙먼지와 피로 얼룩진 청년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어머니를 부르며 부르는 그 멜로디는, 회식 자리의 배경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무게로 가슴을 눌렀습니다. 상무님이 왜 그 노래를 그렇게 절절하게 부르셨는지, 그 순간에야 조금 이해가 됐습니다.
명분 없는 전쟁이 남긴 것, 반전(反戰) 메시지
고지전이 단순한 전쟁 블록버스터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철저한 반전(反戰) 서사 구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전 서사란 전쟁의 승리나 영웅적 희생을 찬양하는 대신, 전쟁 자체의 폭력성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서사 방식을 뜻합니다. 기존 한국 전쟁 영화 중 상당수가 애국심과 이념 대결을 서사의 중심에 놓는다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고지전은 그 틀을 아예 부수는 방향을 택했다고 생각합니다.극 중 북한군 장교가 "처음엔 왜 싸우는지 확실히 알았는데,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다"고 읊조리는 대사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문장입니다. 목적은 사라지고 살육이라는 수단만 남은 이념 전쟁의 허상을 이 한 마디로 압축해 버립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서늘하게 느꼈던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판문점에서는 에어컨이 돌아가는 협상 테이블에서 영토 1센티미터를 두고 탁상공론이 이어지는 동안, 애록고지의 병사들은 어제 아군이 점령했다가 오늘 다시 적군에게 빼앗기는 무의미한 고지를 향해 매일같이 제 살점을 던집니다. 이 구도 자체가 전쟁이라는 시스템이 개인에게 가하는 구조적 폭력을 날 것으로 드러냅니다. 전쟁의 비인간화라는 주제를 이렇게 직접적으로 다룬 한국 전쟁 영화가 얼마나 있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협정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쓰러져간 이들을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허무하고 건조하게 그립니다. 거창한 애도도, 숭고한 희생의 서사도 없이. 그 허무함이 오히려 훨씬 더 묵직하게 남습니다.고지전을 '잘 만든 전쟁 영화'라고 평가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영화는 한국 전쟁 영화 역사에서 가장 선명한 반전 선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영웅도, 악당도, 승리도 없이 끝나는 이 영화의 결말은 전쟁이 개인에게 무엇을 하는지를 가장 정직하게 직면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고지전이 던지는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명분을 잃어버린 전쟁 속에서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 질문과 함께 영화를 다시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 전선야곡 가사를 한 번이라도 찾아보고 나서 보면, 참호 속 장면들이 전혀 다르게 들어옵니다. 저처럼 뒤늦게 그 무게를 깨닫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