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극은 무겁고 지루하다는 선입견, 혹시 저만 그랬을까요? 저도 그 편견을 가진 채 영화관에 들어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오는 길에는 말없이 여자친구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생각보다 훨씬 깊게 마음을 건드린 작품이었습니다.
사극이 싫다던 제가 극장에 간 이유
평소에 여자친구가 꼭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싶다며 만날 때마다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여자친구가 보고 싶다고 해서 따라간 게 전부였습니다. 평소 저는 빠른 전개와 자극적인 연출이 있는 액션이나 코미디 영화를 즐겨 봤고, 사극이나 역사 드라마는 저에게는 지루한 장르였기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역시 크게 기대하지 않은 채 자리에 앉았죠.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청령포로 유배를 가게 된 단종, 엄흥도와 마을사람들의 익살스러운 장면들은 제가 좋아하는 코믹 요소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왔고,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무게가 서서히 쌓여가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슬픈 역사를 나열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예전에 업무차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단종의 역사를 알고는 있었으나 크게 감흥이 없었습니다. 잠시 들리는 경유지 정도의 느낌이었죠. 영화를 보면서 다시 한번 청령포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그때는 그냥 쉽사리 지나쳤을까'라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 왕과 사는 남자는 내러티브 구조(narrative structure) 면에서 꽤 정교합니다. 내러티브 구조란 이야기가 펼쳐지는 방식과 순서를 말하는데, 이 영화는 코미디에서 비극으로 넘어가는 장르 전환을 억지 없이 자연스럽게 처리했습니다. 웃고 있는 동안 이미 비극의 씨앗이 심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을 정도였습니다.
극장 전체가 숨을 멈춘 명대사들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깊이 기억하는 명대사를 꼽으라면 역시 엄흥도가 단종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입니다. "이제 강을 건너실 때입니다." 단종과 금성대군은 군사를 몰래 모아 한양으로 공격을 하려고 했지만 이미 한명회는 단종과 금성대군이 군사를 일으킬 것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군사를 일으키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역모의 죄를 씌워 단종과 금성대군을 처리하려는 목적이었지요. 결국 단종은 한명회에게 잡혀 사약을 받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흥도는 밤을 틈타 몰래 단종과 만나게 됩니다. 단종은 역적들에게 사약을 받기 싫다며 엄흥도에게 마지막을 부탁하게 됩니다. 결국 사약을 받는 날이 왔고 여기서 짧은 한 문장이지만, 단종과 엄흥도의 그동안의 우정, 마을사람들과 가족 그 이상의 정을 쌓은 시간까지 쌓인 감정이 한꺼번에 터지는 카타르시스(catharsis) 역할을 합니다. 엄흥도가 마지막으로 단종에게 "이제 강을 건널 시간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과 단종의 마지막 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순간은 저도 옆에 앉은 여자친구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평소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닌데 그 장면만큼은 달랐습니다. 엄흥도 역할을 맡은 유해진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장르 선입견이 깨지는 순간, 당신은 어떤 경험이 있었나요?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왜 이걸 이제야 봤지?"였습니다. 제가 사극을 피해왔던 이유가 단순히 무겁고 지루할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이었는데, 이 영화는 그 편견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으로 깨버렸습니다. 사극은 전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영화를 만들지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역사적 사실 자체가 어린 단종이 견디기에는 매우 잔인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안타까운 마음과 전개되는 내용자체가 긴장의 끈을 놓을수가 없었습니다. 수양대군에게 하루하루 노려지고 유배를 가게 되어도 한명회라는 수양대군의 충실한 오른팔이 단종을 아주 철저히 감시합니다. 그 속에서 수양대군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처리하기 위한 명분을 위해 그들이 군사를 일으키게끔 적절히 조율하는 이 역사적 사실 자체가 너무 잔인하면서도 사람의 머리에서 어떻게 이런 발상이 나왔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여자친구와 저는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장면에서 울고, 같은 감정을 나눈 시간이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 이 영화가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사극이 싫다고 단정 짓기 전에, 왕과 사는 남자만큼은 한 번 꼭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