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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년이 넷플릭스에서 다시 만난 90년대 홍콩
어린 시절, 정확히는 감수성이 예민하다 못해 폭발하던 사춘기 시절에 저는 우연히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화면 속을 가득 채우던 화려하고도 쓸쓸한 홍콩의 밤거리, 그리고 인물들의 낯선 방황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화면을 가득 채우는 강렬한 색감과 어딘지 모르게 멋져 보이는 배우들의 모습에 넋을 잃었을 뿐이었지요. 세월이 흘러 일상에 치여 살던 어느 날, 넷플릭스에서 이 전설적인 작품이 리마스터링 되어 공개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가슴 한구석에서 묘한 설렘이 피어올랐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는 기분으로 다시금 재생 버튼을 누르게 되었습니다. 디지털 기술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화면이었지만, 그 속에 담긴 1990년대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과 거친 질감은 고스란히 살아있었습니다. 왕가위 감독 전매특허인 스텝프린팅 기법(화면을 늘어뜨려 잔상을 남기는 촬영 방식)을 통해 구현된 영상미는 예나 지금이나 제 시선을 완벽하게 사로잡았습니다. 화면 속 홍콩은 화려하지만 지독하게 외롭고, 분주하지만 어딘가 텅 빈 듯한 이중적인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지요. 여기에 영화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마마스 앤 파파스의 'California Dreamin''과 페이 언이 부른 '몽중인'이 흘러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습니다. 음악이 시작되자마자 수십 년 전 사춘기 시절 방구석에서 이 영화를 보며 이유 없는 쓸쓸함을 느끼던 그 소년의 감정이 그대로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세월은 흘러 제 모습은 변했지만, 영화가 지닌 고유의 분위기와 음악은 여전히 제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옛 추억의 향수와 고화질의 신선함이 기묘하게 교차하는, 참으로 가슴 벅찬 재회의 순간이었습니다.
유통기한이 없는 감정, 그리고 통조림이 품은 기억들
다시 본 《중경삼림》은 단순히 '멋진 영화'를 넘어, 인간의 외로움과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1부에 등장하는 경찰 223(금성무 배우)이 헤어진 연인을 기다리며 자신의 생일이자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찾아 헤매는 장면은 여전히 가슴을 아리게 만듭니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의 사랑은 만 년으로 하고 싶다"는 그 유명한 대사를 들으며, 과연 우리가 살아가면서 유통기한이 없는 감정을 하나라도 가질 수 있을까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소모되는 세상입니다. 스마트폰 터치 몇 번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오늘날, 유통기한이 지난 통조림을 꾸역꾸역 먹어 치우며 과거의 사랑을 애도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미련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2부에서 경찰 663(양조위 배우)과 페이(왕페이 배우)의 이야기는 분위기를 반전시켜 조금 더 경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여운을 남깁니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방 안의 물건들(수건, 비누, 인형 등)에게 말을 건네는 양조위의 엉뚱한 연기는 볼 때마다 웃음과 애잔함을 동시에 자아냅니다. 그의 닫힌 마음의 공간에 몰래 들어가 가구의 위치를 바꾸고 집안을 청소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페이의 모습은, 사랑이란 결국 누군가의 우주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는 과정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 영화는 소통이 단절된 대도시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극도의 고독을 다루면서도, 결국 그 외로움을 치유하는 것 또한 인간의 온기와 만남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연출 속에 숨겨진 이 따뜻한 시선이야말로 이 영화가 오랜 시간 동안 명작으로 추앙받는 진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먼 훗날, 나의 통조림 속에서 다시 꺼내어 볼 그날을 기다리며
이처럼 《중경삼림》은 저에게 단순한 텍스트나 영상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영혼의 안식처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영화를 모두 보고 화면이 검게 변한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긴 여운에 잠겨 있었습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저에게도 아주 소중한 기억을 담아둘 수 있는 비밀스러운 통조림이 존재한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이 영화 《중경삼림》을 그 속에 고이 간직하고 싶다고 말이죠. 세상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하고 심지어 인간의 기억력 또한 세월의 무게 앞에 흐려지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가 주는 감동만큼은 방부제를 가득 넣은 것처럼 절대 변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 이 순간 느낀 감정들을 마음의 통조림 속에 잘 밀봉해 두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세월이 덧없이 흘러 제 머리가 하얗게 세고,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인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 저는 먼지 쌓인 마음의 창고에서 이 통조림을 다시 꺼내어 열어볼 것입니다.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고 넷플릭스 혹은 그 미래의 무언가로 이 영화를 다시 재생했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이 들지 벌써부터 무척이나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꼬질꼬질했던 사춘기 시절의 제 모습과, 치열하게 살아가던 청년 시절의 제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을까요? 그때가 되어도 양조위의 눈빛은 여전히 그윽할 것이고, 페이의 'California Dreamin''은 변함없이 경쾌하게 울려 퍼질 것입니다. 청춘의 방황과 외로움, 그리고 사랑의 설렘을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박제해 놓은 영화 《중경삼림》. 먼 훗날 할아버지가 되어서 만나게 될 그날을 기약하며, 여러분도 가슴속에 자신만의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닌 '인생 영화 통조림'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