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장에서의 첫 만남,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마주한 우치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만났던 건 파릇파릇하던 학창 시절, 동네의 작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였습니다. 당시에는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들이 막 극장가를 점령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어요. 하늘을 날아다니고 레이저를 쏘는 서양 히어로들 사이에서, 조선 시대의 도사가 부적을 날리고 도술을 부린다는 설정 자체가 사춘기였던 저에게 엄청난 신선함을 주었습니다. 돈이 생기면 무조건 극장으로 달려가던 시절이었는데, 친구들과 팝콘 한 통을 나눠 먹으며 전우치의 능청스러운 대사에 깔깔거렸던 그 여름날의 공기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특히 전우치가 그림 속에서 튀어나오거나 궁궐에서 왕을 속여 장난을 치는 장면에서는 온 극장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었죠. 그렇게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영화를 최근 방구석 1열에서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참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그저 화려한 액션과 강동원 배우의 빛나는 비주얼, 그리고 유해진 배우의 신들린 감초 연기(초랭이 역)에만 눈이 갔었거든요. 그런데 머리가 굵어지고, 사회생활의 쓴맛을 어느 정도 알게 된 지금 다시 보니 영화의 디테일들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조선 시대에서 현대인 2000년대 서울로 시공간을 초월해 떨어진 전우치의 모습이, 어쩌면 매일 낯선 환경과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며 적응해야 하는 우리 현대인들의 외로운 고군분투와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그저 통쾌한 오락 영화로만 소비했던 작품이, 시간이 흘러 제 경험의 깊이만큼 다르게 읽히는 경험 자체가 무척 신비로웠습니다.
도술보다 강한 '풍학과 풍류',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영화를 다시 보면서 가장 깊게 몰두했던 부분은 '과연 진정한 도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영화 속 전우치는 스승인 천관대사에게 항상 혼이 납니다. "너는 왜 도술을 쓰느냐?"라는 스승의 질문에 우치는 그저 이름을 알리고 천하를 호령하고 싶어서라고 당당하게 말하죠.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전우치처럼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고, 자신만의 강 강력한 '무기(도술)'를 가져서 세상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품고 삽니다. 돈,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현대 사회의 도술이 아닐까 싶어요. 반면 악역으로 나오는 화담(김윤석 분)은 겉으로는 고고한 척하지만, 결국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요괴의 피와 끝없는 탐욕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해 버립니다. 저는 이 두 인물의 대비를 보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치는 비록 철없고 장난기 가득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타인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인간적인' 인물입니다. 반면 화담은 스스로를 도덕적이라 포장하면서 뒤로는 남을 짓밟는 위선자죠. 영화 후반부, 우치가 "도술이란 무엇이냐? 그저 둔갑술이고 눈속임일 뿐이다"라고 깨닫는 장면은 제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이 사실은 한낱 부적 한 장, 도술 한 자락처럼 부질없는 눈속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결국 중요한 것은 강력한 힘(도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힘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풍학을 울리고 인생을 즐길 줄 아는' 여유로운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각박한 세상 속, 우리에게 필요한 '전우치 스피릿'
글을 마무리하며, 영화 <전우치>가 15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사랑받는 이유를 다시금 되짚어보게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CG가 훌륭해서도, 배우들이 멋있어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매일같이 꽉 막힌 출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싣고, 삭막한 빌딩 숲에서 모니터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전우치처럼 답답한 현실의 벽을 시원하게 깨부수어 줄 '해방구'가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전우치가 빌딩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짜증 나는 인간들에게 도술로 통쾌한 복수를 해줄 때 우리가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거 참, 날씨 한번 좋다!"라고 외치며 능청스럽게 웃어넘길 수 있는 '전우치스러운 호기로움'이 아닐까 합니다. 삶이 팍팍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기보다는 마음속에 부적 한 장 품고 있다고 주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전우치, 여기 있다!"라는 그의 시그니처 대사처럼, 우리도 당당하게 세상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속 깊은 곳까지 시원해지는 유쾌한 활극을 보고 나니, 내일부터 마주할 지루한 일상도 조금은 가볍고 즐겁게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적인 에너지가 솟아납니다. 아직 이 영화를 안 보셨거나, 저처럼 아주 오래전에 보셨던 분들이라면 이번 주말에 꼭 한번 다시 꺼내 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