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팝콘 각 잡다가 역사책을 펼치기까지
평소에 웰메이드 정치 스릴러 영화를 워낙 좋아하는 편이라, <남산의 부장들>이 개봉했을 당시부터 제 레이더망에 강력하게 걸려 있었습니다. 사실 주말 저녁에 치킨 한 마리 시켜놓고 편안하게 '팝콘 무비'나 즐겨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리모컨을 들었지요. 영화가 시작되고 이병헌 배우의 그 묵직한 눈빛과 마주하는 순간, 저는 먹던 치킨 다리를 조용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 안의 공기마저 1970년대의 그 서늘한 남산 집무실로 변하는 듯한 묘한 압박감이 밀려왔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상영되는 114분 동안 화장실 한 번 가지 못하고 모니터로 빨려 들어갈 듯이 몰입해서 감상했습니다. 영화가 끝난 후,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의 그 멍한 기분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할아버지, 아버지 세대가 실제로 겪었던 격동의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피부로 와닿았기 때문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학창 시절에 국사 시험 점수만 잘 받기 위해 10·26 사태를 그저 단순한 암기 과목의 한 줄로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김재규, 차지철, 박정희라는 이름들이 교과서 속 박제된 글자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신념으로 똘똘 뭉친 생생한 인간들이었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날 밤, 저는 밀려오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새벽까지 구글링을 해가며 실제 역사적 사건들과 영화 속 각색된 부분들을 비교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통이 즐겨 마셨다던 시바스 리갈의 의미부터, 영화 속 인물들의 실제 모델인 김재규와 차지철의 관계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찾아보느라 완전히 밤을 지새우고 말았습니다. 영화 한 편이 한 인간을 이렇게 야밤에 역사 탐구 생활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참 신기하고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2인자들의 서글픈 왈츠와 권력이라는 마약
<남산의 부장들>을 보면서 제가 가장 깊게 몰입했던 부분은 인간의 지독한 '소외감'과 '인정욕구'였습니다. 극 중 김규평(이병헌 분)은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2인자이지만, 동시에 언제 버려질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박통의 이 달콤하고도 잔인한 한마디는 김규평의 영혼을 쥐락펴락합니다. 직장 생활을 해본 분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시겠지만, 상사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다가도, 이내 싸늘해진 눈빛 하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그 직장인의 비애가 권력의 최상층부에서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곽상천(이희준 분)과의 유치 찬란한 충성 경쟁은 헛웃음이 나오면서도 한편으로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탱크를 밀어버리자는 과격한 주장을 서슴지 않는 곽 실장의 모습을 보며, 권력이라는 눈먼 권세가 인간을 얼마나 맹목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절감했습니다. "각하가 곧 국가다"라는 뒤틀린 신념이 낳은 비극을 보며, 과연 진정한 충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맹목적인 복종은 결국 자신뿐만 아니라 조직과 국가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독약이 된다는 사실을 영화는 아주 냉철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이 영화는 단순한 정치 외교적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권력이라는 거대한 블랙홀 주변을 맴도는 인간들의 나약한 내면을 해부한 심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왜 그토록 타인의 인정에 목을 매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설수록 점점 더 고독해지고 괴물이 되어가는 것일까요? 영화가 던지는 이 질문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묵직한 화두라고 생각합니다.
웰메이드 스릴러가 남긴 여운과 우리의 자세
글을 마무리하며 돌이켜보면, <남산의 부장들>은 단지 1979년의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배우들의 신들린 듯한 연기력, 당시의 차가운 공기마저 담아낸 듯한 정교한 미장센, 그리고 숨 막히는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력까지 삼박자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그야말로 대한민국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습니다. 특히 마지막 총성이 울려 퍼지기 전, 궁정동 안가의 그 정적과 이병헌 배우의 경련하는 듯한 안면 연기는 몇 번을 다시 봐도 소름이 돋는 명장면입니다. 혹시라도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이 계신다면, 다가오는 주말에 꼭 시간을 내어 감상해 보시기를 강력히 추천해 드립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거창한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평범한 일상과 민주주의 체제가 얼마나 수많은 격동과 비극적인 사건들을 거쳐 왔는지 다시금 되새겨보게 만드는 고마운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았듯,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작은 선택과 관심 역시 미래의 역사가 될 것입니다. 비록 영화는 비극적이고 무겁게 끝이 났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은 역사적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권력의 덧없음과 인간 본성에 대해 이토록 유쾌하면서도 날카롭게 파고든 영화를 만날 수 있어 관객으로서 매우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저의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솔직한 감상평이 여러분의 영화 선택이나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고 행복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