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넷플릭스에서 마주한 한국형 SF의 첫인상
주말 저녁,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소파에 깊숙이 기대어 넷플릭스를 켰습니다. 평소 같으면 스릴러나 범죄 다큐멘터리를 찾았겠지만, 그날따라 메인 화면에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던 영화 <승리호>의 포스터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한국에서 만든 최초의 우주 배경 SF 블록버스터라는 타이틀은 개봉 전부터 워낙 뉴스와 커뮤니티를 통해 많이 접했던 터라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어설픈 CG로 할리우드 영화를 흉내 내다가 이도 저도 아닌 망작이 된 건 아닐까?' 하는 한국형 장르물에 대한 묘한 불신이 제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죠. 배달 앱으로 치킨을 한 마리 시켜두고, 가벼운 마음으로 '킬링타임이나 하자'는 생각에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되고 불과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저는 들고 있던 닭다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면 가득 펼쳐지는 서기 2092년의 우주 공간과 황폐해진 지구, 그리고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승리호의 등장 씬은 제 예상치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할리우드 마블 영화나 스타워즈 시리즈에서나 보던 매끄럽고 웅장한 우주선들의 비행 장면이 한국 배우들의 찰진 욕설, 친숙한 한국어 대사와 섞여 나오는 그 이질적이면서도 짜릿한 쾌감은 정말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특히 유해진 배우가 모션 캡처와 목소리 연기를 담당한 로봇 '업동이'가 우주 공간을 유영하며 작살을 던지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영화 중반부로 갈수록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등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캐릭터들이 티격태격하면서도 하나의 가족처럼 엮이는 과정이 꽤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 발견된 인간형 로봇 '꽃님'이를 중심으로 승리호 선원들의 태도가 변해가는 모습은 다소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에 몰입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방구석 소파에서 치킨을 먹으며 보기 시작한 영화였지만, 어느새 저는 승리호의 조수석에 앉아 그들과 함께 우주 쓰레기를 줍고 있는 듯한 묘한 소속감마저 느끼고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택해야만 했던 아쉬움이 싹 가실 만큼, 제 방 안을 훌륭한 우주 극장으로 만들어준 아주 강렬하고 시각적으로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화려한 CG 뒤에 숨겨진 씁쓸한 기시감
<승리호>를 끝까지 감상한 후 제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한국 영화의 기술력이 이 정도로 발전했구나"하는 감탄이었습니다. 제작비가 약 240억 원 정도 들었다고 들었는데, 할리우드 SF 블록버스터들이 수천억 원의 예산을 쏟아붓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 기적에 가까운 가성비와 퀄리티를 뽑아냈다고 생각합니다. 우주 정거장 UTS의 세밀한 묘사나 광활한 우주에서의 속도감 넘치는 추격전은 칭찬을 아끼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포장지를 벗기고 그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보았을 때, 과연 스토리와 연출 면에서도 그만큼의 혁신이 있었는가를 묻는다면 아쉬움의 한숨이 먼저 나옵니다. 가장 비판하고 싶은 부분은 바로 한국 상업 영화 특유의 고질병인 '신파'의 늪을 이번에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등장인물들의 과거 서사를 풀어내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주인공 태호(송중기)가 잃어버린 딸 순이를 찾기 위해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눈물겨운 사연은 관객의 감정을 억지로 쥐어짜 내는 듯한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우주라는 미지의 공간과 새로운 세계관을 무대로 삼았으면서도, 갈등을 해결하고 캐릭터들을 결속시키는 매개체가 결국 '부성애'와 '가족애'라는 뻔한 클리셰로 귀결된다는 것은 스토리의 빈약함을 방증합니다. 꽃님이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는 전개 자체는 납득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과도한 슬로우 모션이나 감성을 자극하는 배경 음악의 남발은 오히려 극의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또한, 악역으로 등장하는 UTS의 회장 제임스 설리반(리처드 아미티지)의 캐릭터 설정도 몹시 평면적이고 아쉽습니다. 화성을 인간이 살 수 있는 새로운 에덴동산으로 만들겠다는 거창한 계획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가 왜 그렇게 지구와 하층민들을 혐오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깊이나 설득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저 전형적인 '미치건 사이코패스 악당'의 틀에 갇혀 있다 보니 주인공 일행과의 대립 구조가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시각적 효과와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구축해 놓고도, 결국 90년대 가족 영화 스타일의 진부한 서사 구조에 이 모든 것을 구겨 넣었다는 점은 <승리호>가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가장 뼈아픈 실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SF영화의 빛나는 이정표, 그다음을 기대하며
이러한 여러 가지 아쉬움과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저는 누군가 저에게 "<승리호> 볼 만해?"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한 번쯤은 꼭 볼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완벽한 명작이라서가 아닙니다. 이 영화가 한국 영화사에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뚜렷하고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장르는 할리우드의 전유물이라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막대한 자본과 압도적인 기술력이 없으면 결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성역처럼 여겨졌죠. 하지만 <승리호>는 그 단단했던 편견의 벽을 보기 좋게 허물어뜨렸습니다. 한국인 캐릭터들이 우주선을 조종하고 화투를 치며 우주 쓰레기를 주워 담는 모습이 결코 어색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 기술로도 충분히 세계 시장에 통할 만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이 영화는 마치 처음 두 발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때로는 넘어질 듯 휘청거리지만, 결국 페달을 밟아 앞으로 나아가는 그 첫 시도 자체가 박수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승리호>에서 발견된 스토리텔링의 한계나 신파의 남용 같은 약점들은 앞으로 제작될 후속 한국형 SF 영화들이 극복해 나가야 할 훌륭한 오답 노트가 되어줄 것입니다.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듯이, 척박한 토양에서 이 정도의 열매를 맺어낸 제작진과 배우들의 도전 정신에는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고 싶습니다. 주말 저녁, 가족들과 함께 팝콘이나 치킨을 나눠 먹으며 가볍게 즐기기에는 이만한 오락 영화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복잡한 철학적 메시지를 기대하기보다는, 한국형 우주 활극이 주는 그 자체의 에너지를 즐기신다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2시간을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벌써부터 승리호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시즌2나 스핀오프가 나온다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봅니다. 앞으로는 시각적인 화려함에 걸맞은 탄탄하고 독창적인 각본까지 장착하여, 전 세계인을 정말로 열광시킬 수 있는 '진짜' 한국형 SF 마스터피스가 탄생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승리호>는 그 위대한 여정의 아주 성공적인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하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