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기력했던 일상 속에서 만난 명량의 울림
몇 년 전, 유독 인생의 모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준비하던 시험에서는 고배를 마셨고, 인간관계마저 삐걱거리며 온몸을 집어삼킨 무기력증 때문에 하루하루가 버겁기만 했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 위에 나 혼자 낡은 배 한 척을 타고 표류하는 듯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엄습하던 때였다. 방구석에 누워 의미 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우연히 OTT 서비스에서 영화 *<명량>*을 발견하게 되었다. 개봉 당시 극장에서 엄청난 흥행을 기록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 삶이 바쁠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영화였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화면 속 이순신 장군의 굳은 표정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조선의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될 때, 묘하게도 내 처지가 대입되기 시작했다. 12척 대 330척이라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 주변 동료들마저 불가능하다며 등을 돌리는 외로운 상황은 당시 내가 느끼던 세상의 벽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영화 속 군사들이 두려움에 떨며 도망치고 싶어 했던 것처럼, 나 역시 내 앞에 놓인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발버둥 치던 중이었다. 특히 명량 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이 홀로 바다 한가운데서 수많은 왜선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는 장면을 볼 때는 숨이 턱 막혔다. 모두가 포기하고 뒤로 물러설 때, 홀로 거친 파도와 적들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그 고독한 싸움이 내 가슴을 깊게 찔렀다. 방구석 이불속에서 그 장면을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 놓인 시련이 아무리 커 보인들, 저 바다 위의 절망보다 클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한동안 화면을 끄지 못했다. 영웅의 화려한 승리보다는, 그 승리를 이뤄내기까지 홀로 견뎌내야 했을 한 인간의 처절한 외로움과 중압감이 내 무기력했던 일상에 커다란 균열을 내며 강한 자극을 주었던 값진 경험이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진짜 리더십'에 대하여
영화 *<명량>을 보며 가장 깊게 빠져들었던 화두는 바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순신 장군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당이 아니라, 이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배 천배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대사를 듣는 순간 가슴에 찌릿한 전율이 일었다. 우리는 흔히 영웅은 태어날 때부터 두려움이 없고 완벽한 존재일 것이라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최민식 배우가 연기한 이순신은 결코 초인적인 신이 아니었다. 밤마다 홀로 앓아누워 고뇌하고, 피를 토하듯 숨을 몰아쉬는, 우리와 똑같이 두려움을 느끼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주목한 점은 바로 그 두려움을 대하는 장군의 태도였다. 장군은 두려움을 부정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군사들이 가진 그 짙은 두려움의 실체를 정확히 직시했다. 그리고 그 부정적인 에너지를 삶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는 처절한 '독기'와 '용기'로 승화시켰다. 진정한 용기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진리를 영화는 묵직하게 전달한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 결여된 '진정한 리더십'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말로만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고 자신은 뒤로 빠지는 이기적인 지도자가 아니라,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최전선에 자신의 배를 먼저 정박시키는 리더의 모습. 말 한마디보다 행동으로 증명하는 그 압도적인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뒤에서 주춤거리던 부하들의 두려움이 비로소 용기로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리더들, 그리고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나 자신을 이끌어야 하는 나에게 영화 *<명량>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리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해 깊고 묵직한 질문을 던져주었다.
역사가 주는 위로, 그리고 내 삶의 돛을 올리며
영화의 후반부, 치열했던 싸움이 끝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군사들의 모습과 함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함을 되찾는다. 백성들이 배를 끌어 장군의 대장선을 구해주던 장면과 영화 말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한 걸 후손들이 알까? 모르면 호로자식이제"라며 툴툴거리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대사는 묘한 뭉클함과 함께 긴 여운을 남겼다. *<명량>은 단순히 400년 전의 화려한 전쟁 승리 기록을 자랑하는 국뽕 영화가 아니다. 그 모진 역사의 풍파 속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과,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한 인간의 숭고한 책임감에 대한 헌사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내 삶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달라졌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내게 닥친 현실의 문제들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불행한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보다 훨씬 더한 절망을 견뎌내고 끝내 승리해 낸 선조들의 이야기를 보며, 내가 처한 상황은 어쩌면 기꺼이 이겨낼 수 있는 작은 파도에 불과하다는 위로를 얻었다. 그분들이 피땀 흘려 지켜낸 이 땅 위에서, 고작 작은 미끄러짐 때문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는 건강한 부채감과 책임감도 마음 한구석에 싹텄다. 결국 *<명량>은 나에게 영화 그 이상의 의미로 남았다.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있던 내 마음의 배에 다시 한번 거친 바람을 불어넣어 준 고마운 작품이다. 살다 보면 앞으로도 12척의 배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절망적인 순간을 수없이 마주하게 될 것이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이고 내 편은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외로움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명량의 바다 위에서 홀로 적들을 매섭게 노려보던 이순신의 눈빛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내 안의 두려움을 꽉 움켜쥐고, 당당하게 내 삶의 돛을 올려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뜨거운 용기를 전해주는 영화, *<명량>*에 깊은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