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영화를 볼 때 악역 캐릭터에 이렇게까지 마음이 복잡해진 적이 없었습니다. 2015년 개봉해 전국 관객 1,300만 명을 돌파한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은 통쾌한 오락 영화로 기억되지만, 제게는 한 장면이 내내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오랜 친구가 컨테이너 트레일러 기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태오라는 악역, 그 설계의 빛과 그림자
일반적으로 매력적인 악역이란 비극적 서사(backstory)를 품고 있어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비극적 서사란 악역이 악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성장 배경이나 트라우마를 말하는 것으로, 관객이 악역에게 일말의 연민을 품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 공식이 항상 옳지는 않습니다.
베테랑의 악역 조태오는 그 반대 방향을 택했습니다. 촬영 초반 감독이 몰입감을 위해 조태오의 배경 서사를 넣을지 고민했을 때, 배역을 맡은 유아인 배우가 "그냥 나쁜 놈으로 가죠"라는 의견을 제시했고 감독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베테랑은 철학적 심오함보다 경쾌한 오락성을 지향하는 영화입니다. 긴 배경 설명이 들어갔다면 선악의 구도가 흐릿해졌을 것이고, 관객이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을 겁니다.
조태오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 무례하고 충동적인 폭력성: 파티 참석자를 함부로 대하는 첫 등장 장면, 자신을 얕본 경호원에게 과격한 스파링을 요구하는 장면, 배기사에게 굴욕을 주는 장면까지. 조태오를 감싸줄 만한 부연 설명이 영화 내에서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 빈껍데기뿐인 선의: 배기사의 아이에게 자동차 선물을 건네거나 엘리베이터에서 타인에게 먼저 탑승을 권유하는 장면처럼, 선의인 척하는 행동이 중간중간 삽입됩니다. 이 이중성이 오히려 사이코패스적 성향을 더 또렷하게 드러냅니다.
조태오라는 악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역으로 나옵니다. 즉 인물이 이야기를 거치며 변화하거나 성장하는 궤적이 아예 없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선처의 여지가 없으니 관객은 오히려 더 깊이 몰입할 수 있었고, 결말에서 수갑이 채워지는 순간의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었습니다.
트레일러 기사 장면이 불편했던 진짜 이유
일반적으로 영화 속 노동자 캐릭터는 권력의 횡포를 고발하기 위한 피해자로 그려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 설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옆에서 지켜봐 온 친구의 현실과 너무 달라서,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제 친구는 컨테이너 트레일러 기사로 10년 넘게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무거운 화물을 싣고 장거리를 뛰어야 하고, 차 안에서 쪽잠을 자는 날도 있는 고된 직업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밀린 임금 몇백만 원 때문에 아이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맞아야 하고,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절대적 빈곤층의 모습은 제 친구의 실제 삶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이 크고, 땀 흘린 만큼 정직하게 수입을 올리며 가족을 부양하는 당당한 가장입니다.
영화가 악역의 잔인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를 지나치게 무력하고 납작한 '동정의 대상'으로 설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정직한 노동의 가치가 악당을 빛내기 위한 장치로 소비되는 느낌, 이건 예상 밖의 불편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이 설정이 완전히 허구라고도 할 수 없다는 점이 더 복잡합니다. 영화는 2010년 최철원 전 대표의 이른바 '맥가 폭행 사건'을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습니다. 당시 회사 앞 1인 시위자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임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한 대에 100만 원"이라 말하며 폭행한 사건으로, 영화 속 장면과 구조가 유사합니다. 2007년 한화그룹 재벌 3세의 보복 폭행 사건 등 실제 사건들도 참고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영화는 특정 직업군을 비하하려 한 게 아니라, 실재했던 권력의 폭력을 극화한 것이라는 점은 머리로 이해합니다.
권력과 자본에 의한 직장 내 괴롭힘, 즉 이른바 '갑질'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는지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에도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관련 신고 건수는 꾸준히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또한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갑질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노동자 비율이 적지 않은 수준으로 보고되었습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영화가 극적 장치를 위해 피해자를 다소 무력하게 그렸더라도 관객의 공분을 이끌어낸 배경에는 분명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결국 베테랑이 1,300만 명을 극장으로 불러들인 것은 서도철의 주먹 때문만이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비싼 변호사와 권력의 울타리 뒤에 숨어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특권층의 모습을 수없이 목격해 온 관객들이, "죄지은 놈은 잡는다"는 단순하지만 명쾌한 정의에 목말랐기 때문입니다. 영화적 설정에 대한 아쉬움은 남더라도, 그 갈증을 정면으로 건드렸다는 점에서 베테랑은 분명 시대를 제대로 읽은 작품이었습니다.
베테랑은 통쾌하지만 마냥 가볍지 않은 영화입니다. 재미있게 봤지만 속이 복잡하게 남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이 작품은 그 조건을 충분히 만족합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지금 바로 켜보시길 권합니다. 보셨던 분이라도 조태오의 장면 하나하나를 다시 뜯어보면 처음 볼 때와는 다른 감상이 올라올 겁니다.